30대의 한 여자가 50대의 남자를 위하여 자신의 모든 인생을 버릴 정도로 내던진다는 것이 이 처럼 가능한 것도 참 대단하지만, 세상의 모든 비난을 감수하면서 그리고 자신이 모든 것을 걸고 지키기로 맹세했던 기존 가족들을 다 버리고 배신하면서 까지 오직 이 '사랑' 이라는 단 하나의 주제로 질주할 수 있는 그 남자의 무모함 또한 좋다 나쁘다를 떠나 대단하다고 보인다.
배우든 감독이든 스타든 대통령이든 사람이라면 누구나 먹어야 하고 자야하는 생활인이다. 아무도 하늘을 날 수 없으며, 아무도 순식간에 시공을 돌파할 수 없다. 그러니 여배우와 감독으로서의 홍상수와 김민희는 그렇게 용감할 수 있다 하더라도, 생활인 홍상수와 김민희도 과연 그러할까?
우리는 이 부분에서 비로서 '정상가족 컴플렉스'를 만난다. 이 사회가 수천년을 쌓아오면서도 무너지지 않은 이 오래된 유교적인 가치체계는 그 기간 만큼이나 존재의 이유가 충분하며 이 사회의 거의 모든 사람들이 묵시적인 '동의'하는 것을 그 바탕으로 하고 있다. 그러니 얼마나 견고한 것인가 !!
"그것을 무시하고 돌파하는 것이 가능하냐? 혹은 불가능하냐?"를 떠나서 "과연 그럴 필요가 있느냐?"에 우리는 더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 50대 남자와 30대 여자의 사랑, 남자는 이미 가정이 있으니 '불륜'이라고 해야한다. 그 것이 주는 파장을 차치에 두더라도 과연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지를 먼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정말로 남자가 여자를 사랑한다면 기존의 가정을 먼저 정리할 수도 있었다. 그것은 지금 내가 사랑하는 이 여자를 위해서도 필요했을 수도 있다. 그리고 아마 내가 모르지만 시도해 보았을 수도 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는 그런 정상적인 모든 절차를 무시하고, 한 여자의 인생을 송두리채 소유한다.
물론 여자의 동의가 있으니 일방적이라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경륜과 노련함을 갖춘 50대의 이 남자는 이 여자의 동의가 당장은 순수하나 얼마나 오래갈 수 있는 것일지에 대해서도 아마 미리 가늠해 볼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러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자유로운 창작가이고 또 하루든 이틀이든 '오늘' 혹은 '당장'을 사는 사람이라서 그러지 않았을까 싶다.
최근 우리는 정우성 문가비 커플의 출산을 보면서 우리 사회의 '정상 가족' 이라는 형태가 자꾸만 변해 간다는 것을 보고 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고 또 지키려고 애쓰는 그 '정상가족' 이라는 구성에 대해서 다시한번 생각해 보게 된다.
결론을 말하면 딸들을 둔 아버지로서의 나의 생각은 "위태롭다"는 생각을 먼저 한다. 약자로 태어나 약자로 살다가 약자로 죽는 것이 여자의 일생이다. 그런 약자들에게 사회가 주는 최소한의 '구속력' 조차 배려 받지 못하는, 오로지 감정에 의존하는 그 아무 실체도 없는 '사랑'이라는 것에 대한 몰두가 솔직히 말하면 사실은 불안하다.
그건 어쨋든 '임신된 아기'에게는 아무 책임이 없다. 그저 건강하고 평안하기를 바란다.